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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성경 공부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 루이스

by 우공81 2024. 5. 18.

 

 

김병삼 목사님의 매일 만나 유튜브에서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된 적이 있다. 그 부분이 인상 깊어서 이 책을 구매했다.

이 책은 고위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인 신입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타락시키는 방법에 대해 쓴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악마의 시점에서 쓴 글이다 보니, 예수님을 원수라고 하는 등 표현이 반대여서 약간 헷갈리기는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인 C.S. 루이스가 상당히 위트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책도 재미있다. 악마입장에서는 웃기려고 한말은 아니지만, 그걸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웃긴 것들이 있다.

이 책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 같은 초보 크리스천에게 유용하다는 평이 많다. (심지어 작가서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많이 팔려서 좋긴 한데, 읽지는 않고 선물만 해서 아쉽다며..)

 

작가서문이 은근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C.S. 루이스는 속편을 쓸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결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악마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속편을 쓸 생각이 없다는 것 첫 번째 이유이고, 반대로 천사의 입장에서 쓰는 것은 자신이 그런 거룩한 존재로 생각할 수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악마의 유혹을 받고 산다. 내 안에 얼마나 더러운 것들이 많은 지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타락해 버릴 수 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옥 끝까지 떨어지지 않게 계속 경계해야 할 일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인상 깊은 구절이 참 많고, 기억해 두고 싶어서 아래에 남겨둔다. 너무 긴 것은 요약했다. 

p17(요약)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던 골수 무신론자가 있었다.
그의 생각이 어느 순간 원수(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스크루테이프)는 논증으로 방어하려 하지 않고, 그 즉시 내가 제일 만만하게 최고 흔들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리면서, 점심을 좀 먹어야 할 때가 아니냐고 일러 주었다.
원수가 즉시 반격에 나서서, 이 문제는 점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더구나.
하지만, "중요한 문제니, 점심 먹고 와서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라고 얼른 덧붙이니까, 어느새 일어서 밖으로 나가더군. 나는 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과 거리를 지나가는 73번 버스를 보여 주며,
실제의 삶 앞에 '그 따위 관념' 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물론 그 환자는 지금 우리 아버지(사탄) 집에 안전히 거하고 있지.  

이 부분이 김병삼 목사님 유튜브 매일 만나에서 인용된 부분이다.

p19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 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일상성을 환자한테 주입해야 해. 꼭 한 가지만 명심해 두거라. 기독교에 대해 방어를 하겠답시고 과학(그러니까 진짜 과학)을 활용하려 들면 절대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과학은 결국 네 환자를 부추겨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사색하게 만들고 말게다. 현대 물리학자들 가운데 그런 애석한 사례가 많이 있었지.

과학자 중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지만, 과학으로 부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없다.

p24
환자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만 떠오르지 못하게 하면 돼. '나 같은 사람 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만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의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적당히 주물러 주기만 하면 그런 생각은 간단히 막을 수 있지.
원수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진짜 겸손을 배웠을 리 없거든.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고백한다 한들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해. 사실 마음 밑바닥에서는 이렇게 회심까지 해 두었으니 이만하면 원수의 장부에 상당량 초과 액수를 달아 놓은 셈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데다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 별 볼일 없으면서도 '잘난 척하는' 이웃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겸손이요 선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니 이런 심리상태를 되도록 오래오래 유지하도록 신경 잘 쓰거라

 내 이야기 같아서 매우 뜨끔했다.

 

p28
둘째, 환자가 어머니의 영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란 게 워낙 조잡한 데다가 틀리기 일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상의 인물을 놓고 기도한다고 봐야 한다. 네가 할 일은 이 가상의 인물을 진짜 어머니로부터 날마다 조금씩 더 멀어지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상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 실제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깊은 틈을 갈라놓을 수가 있지.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 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어머니뿐 아니라 누구를 위한 기도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

 

p22
교회에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는 별로 중  요하지 않다. 그들 중에 원수 진영의 위대한 용사가 하나쯤 끼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  덕분에 네 환자는 바보천치가 되어 있거든. 찬송가 음정이 틀린다거나 신발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거나 목살이 두 겹이라든  가 옷차림이 별스런 사람이 주변에 하나만 있어도, 그들의 종교 역시 어쩐지 우스울 것 같다고 얼른 믿어 버릴걸  

목사님 찬송가 틀릴 때 킥킥거린 내 모습 같다.

p32
네 환자처럼 최근에 원수 편으로 복귀한 성인일 경우, 이제야말로 완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이며 규칙에 매이지 않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거든.
초심자가 이런 생각을 할 경우, 사실은 의지와 지성을 집중시키지 않은 채 막연하게 경건한 기분만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꼴이 되는데도 말이야.

인간 중에 콜리지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입술을  움직이며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위해  영혼을 가다듬었을 뿐이며 "기원의 감각"을 만족시킨 것이라고 쓴 적이 있지.

바로 이거다. 얼핏 보면 원수 편의 최고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기도와 비슷하기도 하니, 영리하면서도 게으른 환자들을 오랫동안 속여 넘기기에 딱 좋지 뭐냐. 또 설사 그렇게까지는 못 한다 해도, 육체의 자세와 기도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사기 치는 덴 문제가 없을 게다. 잊지 말거라. 인간들은 자신이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가 하는 짓들이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노상 잊고 산다. 

마음이 중요하지, 육체적인 것이 뭐가 중요하냐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도할 때는 무릎 꿇고 하자.

 

p42
원수가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기에 불안과 걱정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원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바라지만, 우리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물론 네 환자도 인내하며 원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 은 주워 들었을 게다. 원수가 의미하는 바는 뭐니 뭐니 해도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인내로써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건 바로 이 부분에서 그렇게 해달라는 기도이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것도 바로 이것을 매일 감당하기 위한 기도지.

어제 시편을 읽다가 했던 생각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련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53 (요약)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짚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원수가 인간을 사랑한다느니 원수를 섬기는 게 완벽한 자유라느니 하는 말들이 단순한 선전문구가 아니라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점은 우리도 직시해야 한다.

원수는 자신을 작게 복제해 놓은 이 혐오스러운 인간들로 우주를 우글우글 채울 생각을 정말로 하고 있다구.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먹을 가축이지만, 그 작자가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빨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그는 내뿜고 싶어 하지. 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그는 충만해서 넘쳐흐른다. 우리의 전쟁 목적은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다른 존재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세상이지만, 원수가 바라는 건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원수는 아무 때나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서 인간의 영혼이 감지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걸 활용하지 않는지 너도 궁금했겠지. 그러나 '불가항력'과 '논의의 여지없음'은 원수가 세워 놓은 계획의 본질상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임을 이젠 알겠느냐.

 p56
우리는 환자들을 끊임없는 유혹을 통해 질질 끌고 와도 무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방해하면 할수록 좋다. 하지만 원수로서는 우리가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듯이 미덕으로 '유혹'할 수는 없는 일이지. 제 바람대로 인간 스스로 걷도록 가르치려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지 별 수 있겠느냐. 그러다가 넘어져도 계속 걷겠다는 의지만 보이면 그 작자는 좋아라 한다구. 그러니 웜우드, 속지 말거라.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아이들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부분이 많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잡은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온다.

주님께서 무조건 나에게 주시지 않는 이유는 나를 그분의 종으로,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p60
환자가 비관적 인간형이라면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적당한 성경구절에 관심을 끈 다음,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 예전 감정을 회복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계속하도록 부추길 수만 있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어. 환자가 좀 더 희망적인 인간형일 경우에는 먼저 현재의 영적 저기압 상태를 묵인하게 한 다음, 이런 상태도 뭐 그리 심각한 침체는 아니라고 스스로 설득해 가며 차츰차츰 그 상태에 만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한두 주일만 유지하면, 회심했던 당시의 열정이 좀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지.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 음 폭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

처음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의 열정이 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때가 과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했다. 

C.S. 루이스는 진짜 악마 같다. 

 

p65
단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거라구. 혹시 이 작전이 실패하면, 좀 더 교묘하고 재미있는 방법을 써 보거라. 이건 환자가 자기 삶의 이중성을 감지하는 데서 적극적인 쾌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인데, 허영심만 잘 이용하면 어려울 게 없다. 이를테면 주일마다 식료품 가게 주인 옆에서 기도하는 걸 즐기게 하는 거야. 반면 존경스러운 친구들과 함께 커피를 마실 때에는 음담패설과 신성모독적인 이야기를 즐기게 하는 거다. 이번에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면의 깊고 '영적인' 세계를 자기는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이제 좀 감이 잡히느냐?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친구들을 만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게 주인을 만나는 가운데, 환자는 이른바 주변의 두 세계를 다 포용하는 완전하고도 균형 잡힌 복합적 인간 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최소한 두 집단의 인간들을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내심 자기만족에 취하게 된다 이 말씀이지.

교회에 있을 때와 사회에 있을 때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싫어하는 교회의 모습이며, 어쩌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p73
환자가 새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여전히 교회에 드나들며 성찬에 참여한다는 말을 내가 반기다시피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만, 그래도 회심한 후 첫 몇 달 간과 현재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보다야 낫지.
환자가 겉으로나마 그리스도인의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새 친구를 몇몇 사귀고 새 여흥거리를 몇몇 찾았을 뿐이지, 6주 전과 비교할 때 내 영적 상태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야 라는 생각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단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는 한, 환자가 자기 죄를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인정하고 숨김없이 회개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 가 없지.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남겨 놓되 환자가 불편함을 감당치 못하고 마침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지경을 피할 때, 우리는 아주 귀중한 경향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다. 원수에 대해 생각하는 걸 점점 더 꺼리게 되는 경향 말이지 모든 인간은 거의 항상 그런 식의 거리낌을 가지고 있는 법이야.

평소에는 절반쯤 느끼고 있던 죄의식의 막연한 구름이 원수를 생각할 때마다 한층 더 뭉게뭉게 피어올라 눈앞을 가 린다면, 원수를 거리끼는 마음이 열 배는 더 심해지겠지. 원수를 생각나게 하는 거라면 무조건 증오하게 된다 이 말씀이야. 일단 이런 상태에 빠지고 나면 교회는 꼬박꼬박 나가도 종교적 의무들은 점점 더 싫어하게 될 게다.

종교적 의무를 행하기 전에는 그저 남부끄럽지 않은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조금 생각하고, 의무를 끝내고 나면 가능한 한 빨리 잊어버리겠지. 몇 주 전만 해 도 환자의 기도를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네가 유혹해야 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환자 편에서 기도의 목적을 흐트러뜨리고 자기 마음을 무디게 만들어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두 팔 벌리는 모습을 보게 될 게다. 그는 원수를 진짜 만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기도가 비현실적인 게 되길 바라거든. 그의 목적은 되도록 양심의 가책을 일깨우지 않는 것이지.

세상 속에서 죄를 저지르면서,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내가 깨끗한 것처럼 구는 것은 진정한 회개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그나마 나는 종교적 의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교회가 너무 가족적이라, 종교적 의무보다는 가족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교회에 무엇을 기부해도 아깝지가 않은 것은 목사님이 삼촌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선교헌금을 내놓을 때도 아깝지 않았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p75
마땅히 피해야 할 건강한 외향적 활동은 죄다 금지시키면서, 그 대신할 만한 일은 아무것 도 주지 않을 수도 있지. 그렇게만 되면 지옥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하게 될걸. "이제 보니 나는 해야 할 일도 하나 못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나 못 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 버렸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놓고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강하지 않다' (without whom Nothing is strong)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Nothing)이야말로 정말 강하고말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슬쩍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인간은 달콤한 죄도 못 되는 것, 도대체 뭔 지도 모르고 왜 하는지도 모를 것에 미적지근하니 관심을 보이다 말다 하거나 자기도 잘 모르는 어렴풋한 호기심을 채워 보다가, 손장난이나 발장난을 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곡조를 흥얼거리다가, 혹은 흥미로운 욕망이나 야망이 자극된 것이 아닌데도 일단 우연히라도 발을 디디고 나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그 길고도 어둑한 몽상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인생을 낭비한다.

인간이란 그만큼 혼미해지기 쉬운 약한 족속들이야. 이런 건 죄다 사소한 죄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 다른 젊은 유혹자들처럼 깜짝 놀랄 만한 죄악을 보고하고 싶어 안달 난 꼴이 보이는구나. 하지만 명심하거라. 중요한 것은 네가 환자를 원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떼어놓느냐 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던 거 같아. 이제라도 달라져야 한다.

 

p81
그러니 사람이든 음식이든 책이든 환자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 은 버리게 하고, 그 대신 '제일 좋은' 사람, '적합한' 음식, '중요'한 책들만 찾게 만드는 일에 늘 힘쓰거라.

가장 중 요한 건 환자가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이 새로운 회개에 대해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들 행동으로 옮기 지 않는 한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그 하찮은 짐승이 자기 머릿속에서만 뒹굴게 하거라. 글재주가 눈곱만큼이라도 있거든 이 경험에 대해 책을 쓰게 하고. 글쓰기는 원수가 영혼에 심은 씨앗을 말려 죽이는 데 종종 탁월한 효과를 내니까.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이 부분을 보고 블로그에 새벽기도 묵상한 것을 작성하는 것을 중단했다. 블로그 글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p82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그 매일 매 순간에 해당하는 만큼의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오늘 하루 따를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날 마음에 들어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 만족감이 높은 것 같다. 내 평생에 걸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의견을 구하는 것은 너무 크기도 하고,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적해지기도 했었다.

p82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 -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 -이 고개를 들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협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라구.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사회적으로 나쁜 죄를 짓지 않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 형태는 이런 것이 아닐까? 본인 스스로 미덕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의인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미덕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미덕이어야 하며, 세상에서 보는 미덕은 의미가 없다. 

p90
미래만금 영원과 닮지 않은 건 없어. 미래는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게 찰나적인 부분이지. 과거는 꽁꽁 얼어붙어 더 이상 흐를 수 없고, 현재는 영원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혹 정욕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지 말거라. 현재에 쾌락을 느끼는 순간, 죄(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는 이미 저질러져 버린 상태가 된다구.

물론 원수도 인간이 미래를 생각하기를 바라지. 다만 내일 실천해야 할 정의나 자비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길 바란다.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오늘의 의무니까. 모든 의무가 그렇듯이, 그 재료야 미래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시점은 현재 아니냐. 이건 좀 시시콜콜히 따져보며 생각할 문제다. 그 작자는 인간이 미래에 신경을 쓰면서 미래에 보물을 쌓아두길 원치 않지.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그 일이 자기 소명이라 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와 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전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읽으면서 섬뜩하게 느껴진 부분이다.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 이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p113
'사랑'이나 애국심, 독신생활, 제단에 놓는 촛불, 절대 금주, 교육 따위가 '좋으냐 ' '나쁘냐'는 인간들이나 실컷 토론하게 내버려 두거라. 그런 질문에는 해답이 없다는 걸 척 보면 모르겠느냐? 중요한 건 주어진 상황의 심리 경향이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환자를 원수에게로 더 가까이 몰고 가느냐, 우리에게로 더 가까이 몰고 오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좋으냐' 나쁘냐'는 환자 스스로 정하게 두는 편이 낫다. 건강과 질병, 늙음과 젊음, 전쟁과 평화처럼 인간들이 흥분하는 주제들이 대개 그렇듯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 역시 영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가공되지 않은 원료일 뿐이라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나를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느냐, 아니면 멀어지게 하느냐이다.

p121
인간들은 단순히 불행이 다쳤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불행이 권리의 침해로 느껴질 때 분노한다. 이렇게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의식은 자기의 정당한 요구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거야. 따라서 네 환자가 삶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유도하면 할수록 그런 의식을 갖게 되는 횟수가 늘어날 테고, 결국에는 성질도 나빠질 게다.

아내가 죽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분노까지는 아니지만) 그것은 내가 그것이 나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아무것도 내가 가진 것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p123
시간이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시간이 저희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들 소지품이게? 이론상으로 환자는 원수를 전적으로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기 때문에, 만약 원수가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루만이라도 전적으로 섬기기를 요구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게다. 그런데 그 하루의 섬김이라는 게 기껏해야 어리석은 여자의 얘기를 들어주는 정도의 일이라면 퍽이나 안심하겠지. 더구나 원수가 그날 30 분을 내주면서 "이제 나가서 즐겁게 지내라"고까지 한다면 마음이 놓이다 못해 실망감마저 들게야. 환자가 시간에 관한 자신의 전제에 대해 1분만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사실은 자기가 하루뿐 아니라 날마다 이처럼 원수의 시간을 그의 뜻에 따라 써야 할 처지라는 걸 깨닫지 못할 리 없다. 

시간도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허투루 쓸 수 없는 것이다.

p123
일반적으로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 만한 가치가 있지. 인간들은 노상 제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릴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 현대세계가 순결에 그렇게나 반발하는 것도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육체라는 광막하고 위험천만한 땅, 세상을 만들어 낸 에너지가 고동치는 그 땅에 자신들의 동의로 거하게 된 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이'의 뜻에 따라 그 땅에서 물러나야 하는 주제에 들 말이지!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불어넣는 데에는 교만 말고도 혼동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이 소유격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거지. 내 장화로부터 시작해서 '내 개, 내 하인',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상관, '내 나라'를 거쳐 '내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달라지는 그 의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인간들을 잘만 가르치면 이런 의미들을 모조리 내 장화와 같은 뜻, 즉 소유를 나타내는 '내'로 국한시킬 수 있다. 놀이방에서 노는 아이가 '내 곰인형이라고 할 때 도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오랜 애정의 대상이라는 (조금만 방심하면 원수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도록 가르칠 게다)이 아니 라 '움만 내키면 언제든지 졌어 버려도 되는 곰인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시킬 수 있지. '내 하나님'이라는 말도 마 찬가지야. 실제로는 '내 장화'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뜻. 즉 나한테 특별 봉사를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설교단에서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내가 독점하고 있는 하나님'이라 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할 수 있다고. 인간이 완전히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웃음 이 나오지 뭐냐.

이 책 전체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본 부분이다. 나의 모든 것. 심지어 내 몸과 시간마저도 전부 주님의 것이다. 

그것을 착각하여 하나님께 불경을 저지르는 일은 없어야겠다.

p137
다행스러운 일이지 뭐냐. 오늘만 해도 "이러한 믿음만이 낡은 문화들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걸 근거로 내세우면서, 기독교를 제 맘대로 변형시켜 소개하는 기독교 작가의 글을 읽었다. 이 미세한 틈이 보이느냐?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 수법이야. 

작년 말에 엎드려 있던 기간에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삶에 유익하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를 다니면서 얻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 계속 그런 이득에 눈이 돌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p141
즐거운 집단과 지루한 집단의 차이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로 착각하도록 가르치거라...(중략)... 그가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게 만든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 이 점에 관한 원수의 경고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마태복음 10장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p151
원수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적극적 개념이 '비이기주의'라는 소극적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애당초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이익을 포기하도록 가르칠 수 있게 된 건 다 이 덕분이야. 우리로선 큰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셈이지. 남녀 사이일 경우에는 비이기주의에 관한 견해 차이를 이용하 거라. 우리가 그동안 이성 간에 갈라놓은 의견들 알지? 비이기주의라는 게 여자한테는 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걸 뜻 하지만, 남자한테는 남을 수고시키지 않는 걸 뜻한다. 그 결과, 아무리 원수를 섬기는 수준이 높은 여자라도 여느 남자보다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게야. 물론 우리 아버지가 완전히 장악한 남자라면 말이 다르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원수 진영에서 상당히 오래 지낸 남자라도 자발적으로 남을 기쁘게 한다는 점에 서는 기껏해야 여느 여자가 늘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지. 이렇게 여자는 자기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남자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있다고 믿는 한, 뚜렷한 이유 없이도 상대방을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게 될 수 있다.

사랑이든 겸손이든 어떤 미덕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도덕성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년간 교육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게 옳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가?

 

p152
성적인 흥분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흥분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하는 이중의 맹목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숨어 있는 덫을 보지 못할 뿐이야.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명목뿐인 '비이기주의'가 하나의 규칙 ㅡ 감정적 자원은 이미 고갈되었는데 영적인 자원은 아직 확장되지 못한 탓에 지키지 못하게 된 규칙 ㅡ으로 일단 자리만 잡는다 면,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결과들이 줄줄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하려고 의견을 나눌 때마다, A는 A대로 B는 B대로 각자 자기 바람은 제쳐둔 채 상대방의 뜻을 지레짐작해서 편들어 주는 게 의무처럼 되어 버리거든.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 뭘 진짜 바라는지 알아낼 수 없을 때가 자주 있다 는 거야. 운이 좋으면 둘 다 전혀 바라지 않던 일을 해 놓고도 자기 의(義)에 취해서 만족하며, 자신의 비이기주의에 합당한 특별 대우를 은근히 기대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의 희생을 너무 간단히 받아들인다는 불만까지 슬쩍 품게 할 수 있지.

아내는 이렇게 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해주고, 뿌듯해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내를 위해 한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아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p156
어떤 경우 건 환자가 스스로 마음이 흐트러졌다는 생각을 할 시에는 순전히 자기 의지의 힘으로 마음을 추스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평상시처럼 기도하도록 부추겨야지. 마음이 흐트러졌다 는 걸 당면 문제로 인정하며 그걸 원수 앞에 내놓고 주된 기도제목이자 노력할 항목으로 삼을 경우, 넌 좋은 일을 하기는커녕 긁어 부스럼 만든 꼴밖에 되지 않는다.
..(중략)..
인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겉보기에만 경건한 근거에 속아 넘어가, 일용할 양식과 아픈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원수의 분명한 명령(그 작자 특유의 단조롭고 진부하고 재밌대가리 없는 방식으로 내린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를 때가 많단다. 물론 이때 환자에게 숨겨야 할 사실이 하나 있지. 저들이 '일용할 양식'을 아무리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구한다 한 들, 사실은 그 밖에 다른 의미로 구할 때보다 고차원적이랄 것도 없는 노골적인 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자기의 의지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교만으로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명령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p157
'기도란 부조리한 것으로서 객관적인 결실을 하나도 맺지 못할 수 있다'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염려하게 만들 수는 있지. 만약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간구해 봤자 소용없다는 증거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또 설사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 성취의 물리적 원인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니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성취된 기도 역시 거절당한 기도나 다름없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걸 증명하는 좋은 증거로 삼을 수 있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는 생각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p159
환자는 원수가 인간이 드릴 기도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으며, 그렇다면 자유의자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대로 기도하는 게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인간 세계든 물질세계든 모든 만물은 '처음부터' 결정 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덧붙이겠지. 환자가 뭘 놓치고 있는지 알 만하지? 시간과 공간의 매 지점에서 창조 전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게야. 아니, 그보다는 인간처럼 제한된 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총체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는 창조 행위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밖에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창조 행위 속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 놓았느냐 하는 점은 정말이지 골칫거리 중에 골칫거리로서 '사랑'에 대한 원수의 헛소리에 숨어있는 비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지. 원수는 인간들이 자유롭게 미래에 기여하는 바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없는 현재 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거든. 

조금 어렵지만, 요약하면,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보는 것과 달리, 주님은 모든 것이 현재이다. 따라서 창조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이 창조에 개입된다는 것이다.

p164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낼 경우에는 우리의 입지가 한층 더 확고해진다. 풍요로움은 인간을 세상에 엮어 놓거든. 풍 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라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자기 속에서 자리를 찾은 것인데도 말이야. 갈수록 높아지는 명성, 넓어지는 교제권, '나는 중요인물'이라는 의식, 열중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의 가중되는 압력 등은 '이 땅이야말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다. 너도 알게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중년층이나 노년층보다는 청년층이 죽음을 훨씬 덜 꺼리는 법이지. 

무서운 말이다. 결국 재물이 많고, 인생이 편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p166
그들을 이 땅에 붙들어 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정치나 우생학이나 '과학'이나 심리학이나 기타 등등의 힘으로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날이 오리라고 믿게 만드는 것 정도이다. 진정한 세속성은 시간의 작품이야. 물론 교만의 도움도 받긴 한다만. 우리는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을 분별이니 성숙이니 경험 따위의 말로 표현하도록 교육한다. 특히나 우리가 교육해 놓은 특별한 뜻으로 쓰기만 한다면 경험이야말로 가장 쓸모 있는 단어이지. 예전에 한 위대한 인간 철학자가 "미덕에 관한 한 경험은 착각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비밀이 탄로 날 뻔한 적이 있었지만, 유행의 변화와 역사적 관점에 힘입어 그 책의 해악을 대부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시간은 사람을 세속적으로 만든다. 경험으로 사람이 성숙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이 또한 사람을 세속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 같다.

p171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원수가 위험으로 가득 찬 세계를 창조한 동기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런 세계라야 실제로 도덕적인 문제들이 핵심 사안으로 등장할 수 있으니까. 용기란 단순히 수많은 미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시험의 순간, 즉 가장 첨예한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에 모든 미덕이 하나같이 취하는 형태라는 사 실을 원수도 너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위험에 굴복하는 순결이나 정직이나 자비는 조건부의 순결이나 정직이나 자비에 불과해. 빌라도도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자비로운 인간이었지. 

빌라도도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자비로운 인간이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어려움만 겪은 것은 아닐까?

p171
다만 네가 방심한 사이 환자가 원수 쪽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작금의 상황을 볼 때, 절망을 일으키는 죄보다는 절망 그 자체가 더 큰 죄라는 점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니 네가 해야 할 일은, 의무는 잊어버린 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한 막연한 생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미신에 기대는 마음을 일깨우는 방법도 있지. 요점은 원수와 그가 공급해 준 용기 말고도 기댈 곳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임무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할 곳이 벌집처럼 숭숭 뚫려 버릴 게야. 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함으로써, 환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의지의 차원에서 '그런 최악의 사태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해 놓으면 환자가 진짜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공포를 놈의 신경과 근육에 들이부어 치명적인 행동을 하게끔 유도할 수 있지. 명심하거라. 중요한 것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이야. 공포의 감정 그 자체는 죄가 아닐뿐더러, 보기엔 즐거워도 소득은 별로 없다 

절망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가 죄이다. 공포의 감정이 죄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이 죄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면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공포가 생기더라도 이를 극복할 용기가 있을 것이다.